비정규직보호법 단상 - 대의제 민주주의, 절대선일까. 시사비평

  한 잔 하고 쓰는 거라 양해 부탁하는 바입니다.

  백수인턴으로 청춘을 보내야 하는 20대, 비정규직은 남의 얘기가 아니다.  지난 주 백분토론에 전화참여한 시청자가 분통을 터트리며 말했듯이 이것은 우리의 '생계전선' 그 자체이다.  3년전인가, 김연아를 낳았다고 우기는 우리학교 졸업생도 40%가 비정규직이란 얘길 들었다.  88만원 세대라는 개념까지 굳이 인용하지 않아도 우리들이 직면한 상황이 어떤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뭐 어쨌든, 7월 1일부터 시행된 비정규직 보호(?)법은 2년 이상 비정규직으로 여러 차별적인 대우를 감내해가면서 일한 자에게 정규직 혹은 해고 둘 중 하나를 선택하기를 강요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선택권은 일하는 자에겐 없다.  경제사정이 안좋다거나 노동시장 유연화니 어쩌고 하면서 그냥 짤리는 것이다.  1년 11개월 29일 23시간 일한 사람을 쫓아낸다 해도 회사는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는다.  피눈물날 일이다.  울컥하지 않을 수 없다.

  노동부, 한나라당, 민주당 중 누구 책임이냐를 놓고 요즘 격론이 벌어진다.  부질없는 짓이다.  애초부터 노동자나 국민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비정규직 악법이 열린우리당의 직권상정으로 통과되었었고, 한나라당은 당시 슬쩍 양보해주는 듯한 냄새를 풍기면서 그 이후 손을 놓아버렸다.  결사반대를 마지막까지 외쳤던 민노당, 그들도 더 강경했어야 했다.  금뱃지 전부 뗄 각오 하고 말이다.  정부부처인 노동부도 마찬가지이다.  2009년 7월 1일을 대비해야 한다는 각계의 지적이 정부에게 쏟아졌는데도 무심히 손 놓고 있다가 기껏 지난 4월에 한다는 소리가 법 적용을 4년 유예하잔다.  2년 동안 국회와 정부를, 법을 믿고서 정규직이 되겠다는 희망을 가지고 희생해온 수많은 사람들에게 4년이란 시간을 계약 해지의 불안감 속에서, 차별대우 속에서 살기를 강요하는 것이다.  물론 논리는 경제위기다.  노동부 관료들이 노동 분야에 전문적인 지식을 가졌으리라 신뢰하고 싶지만 마음처럼 잘 안된다.  유예기간이  한나라당의 2년이든 선진창조모임의 1년 6개월이든 민주당의 6개월이든 간에, 이제와서 발등에 불똥이 떨어진 마냥 급히 유예기간을 논의한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정치권력이 무책임한가를 알 수 있다.  그 기간이 지나면 지금과 같은 논란이 또 반복될 것이다.(한나라당은 유예기간을 비정규직 보호를 위한 준비시간 마련 차원이라고 한다.)  기업들은 당연히 법을 신뢰하지 않을 것이다.  법이 아무리 정규직 전환 의무를 외쳐봐야 '정규직화? 그거 그냥 물건너 가는구나.  이대로 가만 있으면 되는구나.' 할 것이다.

  게다가 정규직화에 앞장서야 할 정부산하 공기업들이 오히려 앞다투어서 해고를 남발하고 있다.  정부산하 기관들이 이 모양인데 사기업들이 자율적으로 정규직화 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오늘 기사를 보니  이 대통령은 4대강 22조에 이어 녹색강국을 만들기 위해 몇 년간 100조 이상을 투입할 거란다.  일하는 자가, 사람이, 우리 인간들이 피눈물을 흘리고 있는데 허울좋은 강국이니 뭐니... 정말이지 역겹다.  330억인지 전재산 사회 환원한다더니 코흘리개들도 예상했듯 재단을 만든다고 한다.  일해재단 육영재단 아태재단 아주 그냥 ... 우리나라 재단들이 돌아가는 꼴과 특히, 자산가들이 은퇴 후에 복지재단 교육재단 만들어서 장학사업에 학교설립하는 이유가 뭔지, 그 재단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거기에 누가 앉혀지는지, 돈놀음하는 그 꼴 우리는 아주 잘!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요즘들어 떡볶이집까지 찾아다니며 서민들 챙기고 비정규직 노동자들 걱정해주는 청와대와 정부 여당이 있는데, 이상하게도 우리가 행복하지 않은 이유가 이 때문일까.  위와 같이 대통령이나 정부여당을 믿지 못하게끔 하는 수많은 실례들이 우리 앞에 펼쳐지기 때문이다.  도저히 믿을 만한 구석이 없다. 

  두서없어졌지만, 내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이것이다.  정부든 정당이든 간에 그들에게 우리네 인생, 아니 가족의 인생까지 좌지우지할 권한을 누가, 언제 줬나.  정치인들이 대의제 민주주의, 선거를 통해 민주적 정당성을 가졌다고 해서 개개인의 운명을 이렇게 쥐락펴락해도 되는 걸까.  요즘 아나키즘에 심취한 친구가 있는데, 공상적이라고만 느껴졌던 정당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그의 말이 아주 설득력있게 들리기 시작했다.  정치권력, 정책 앞에서 우리들은 너무나 소외되어 있으며 무력하기 그지 없다.  대의제 민주주의가 정당을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여김에도 불구하고 대의제 민주주의는 역설적으로 우리로 하여금 정당을 신뢰하지 않게, 혹은 정당에 무관심하게끔 만든다.  우리 의사가 도통 반영이 안되기 때문이다.  내 뜻을 실현할 가능성이 있는 정당이 있어도 그 정당은 의석이 모자라거나 우리 말을 잘 안듣거나 해서 아무 것도 우리 의사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아무도 정치엘리트 몇몇의 장난질로 수많은 민중들의 인생을 쥐락펴락하라는 허락을 한 적이 없다.  나치 등 독재정권의 밑바탕이 된 칼 슈미트류 헌법가들의 국가선재이론, 즉 국가가 개인보다 먼저 존재하고 개개인은 그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국가의 구성원이 된다는 이론은 폐기된지 오래다.  국가를 개인보다 중요시하는 현실을 낳았기 때문이다.  가만 보니 오늘날은 민주주의 선재이론이 유행인가보다.  우리 인생을 좌지우지할 정치인이 먼저 존재하고 태어날 때부터 우리는 그에게 우리의 운명을 맡겨버린 모양이다.  나경원 의원이 미디어법 얘기하면서 국민 의사 하나하나 물어보면서 입법 못한다는 투정을 부린 것과 비슷한 맥락인 듯 하다.  우리는 민주적 정당성을 가진 다수당이 시키는데로 참으면서 살기로 그렇게 정해진 창조물인 걸까. 

  이거 아니다.  당연히 아니다.  대의제 운운하면서 정치인이 국민에게 침묵과 희생을 요구하는 것, 이건 정의가 아니다. 민주주의는 개개인의 행복을 위한 도구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국가는 국민의 행복을 위한 도구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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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닥슈나이더 2009/07/07 08:54 # 답글

    그런데.... 이번 법 이전에도....
    비정규직 법안 자체가 있긴 있었지 않았나요??
    그때는 아예 정규직 전환에 대한 이야기가 없지 않나 싶은데...
    이거 그때도 일하고 있었으면서.. 기억이 잘 안나네...ㅠㅠ;;;
  • 강수영 2009/07/17 19:16 #

    비정규직을 정규직화하거나 차별대우를 금지하는 등의 보호법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노동계가 현행 비정규직보호법을 반대했던 이유는 '2년' 등의 기간을 산정하는 것 자체가 시간끌기에 비정규직 제도 고착화로 이어질까 걱정했기 때문입니다. 기간이 끝날 무렵에 또 기간을 연장하거나 아예 유예기간을 무기한으로 하자는 논쟁이 벌어지기 때문이죠. 지금 돌아가는 꼴을 보니 노동계의 우려가 현실화될 것 같습니다.

  • 얼굴마루 2009/07/07 15:30 # 답글

    (나를 제외한) '우리'나라는 노동시장의 유연성이란 긍정정인 개념을 기업의 신자유주의논리에 맞게 요리하도록 터를 단단하게 마련해 놓은거 같아. 스웨덴에서는 오히려 비정규직을 선호한다더군. 정규직과 임금은 동일한데 자신이 원하는 시간에 자유롭게 일할 수 있는 매력때문이래.
    글구 비정규직이 니가 말한대로 '해고'라는 실존적 문제에 직면하고 있지만, 소수자로서의 비정규직 문제도 심각하더라. 현대차는 비정규직이랑 정규직 옷도 다르고 모기업은 비정규직들은 구내식당에서 밥도 못먹는다더라구. ssibal
    이럴 때마다 탈권위주의를 지지하는 나지만 카리스마있는 지도자를 희망 안 할 수가 없어.
    87년 7월의 노동자 대투쟁이 재현되길 바라며...ssibal
  • 강수영 2009/07/17 19:19 #

    노동시장이 유연해지면 기업 입장에서 아주 경쟁력이 높아지겠지. 하지만 노동시장의 유연성의 전제, 사회적 기반 조성에는 전혀 관심도 없이 기업의 이해관계만 고려해서 밀어붙이는 형국이니.

    2000년대 들어서도 주 70시간이라는 살인적인 노동을 하면서도 정규직에 비해 30% 정도의 임금을 받는 경우가 있더라고.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우리나라처럼 파견노동자를 이런 식으로 차별하는 나라가 또 있을까.
  • 2009/07/08 15:39 # 삭제 답글

    비공개 덧글입니다.
  • 강수영 2009/07/17 19:21 #

    음~
    오래전부터 사민주의자들의 의회진출을 통한 사회개혁, 이것이 정답이라고 생각해온 나였지만 정치토양이 너무 척박하다보니 좌절감이 심해지기도 하더라.
  • 2009/07/21 00:50 # 답글

    비공개 덧글입니다.
  • 강수영 2009/07/21 00:53 #

    전에 얘기 했잖어 임마 -_-ㅋ
  • 민근 2009/07/21 00:54 # 답글

    실시간 답글 쩔어염..
  • swisdom 2009/07/22 14:56 # 답글

    그래서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잇을까요. 신문을 봐도 지겹고 조롱당하는 기분에 뉴스도 보기 힘들어요. 싸워야 하는 건 많은데 어떻게 해야 이길 수 잇을지, 나는 정말 어지러워요 ~_~ 오늘은 또 미디어법 직권상정 빠밤~ 어제는 저작권법 빠밤~ 7월 초엔 비정규직 빠밤~ 그 전엔 용산빠밤~ 인권위원장 빠밤~ 난리가 낫시요;
  • 강수영 2009/07/25 00:28 #

    살짝 기분을 가라앉히고, 말씀해주신 것들을 잊어버리지 않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도 기사들 보면 감정이 북받쳐서 힘드네요 요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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